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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결핍들에게

His제이 2025. 3. 20. 21:02

 
안녕이라는 말도 너무 급하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쓰게 됐어. 미안하다는 사과부터 할게. 사과하려고 적은 편지는 아니고 어쩌면 반대에 가까운데 이 편지를 내용도 모르고 읽을 너의 표정이  상상돼서. 너무 반갑게 읽으면 미안해서.
 
속으로 깊이 미워했어. 너도 알지? 그것도 미안한데, 사실 더 미안한 건 그렇게 죽일 듯이 원망했으면서 만만하다는 이유로 너를 너무 쉽게 핑계 삼았어.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유독 예민해질 때마다 네 이름을 댔어. 내가 아니라 네가 그랬다고. 사실 너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내 성질머리였을 때도 많았는데. 그냥 네 이름으로 눙치고 지나갔어. 미안하다. 어쩌겠니. 가끔은 정말 너 때문에 그런 적도 있었으니까. 그땐 모를 때가 많았지만.
 
널 처음 만난 날이  기억나. 중학교 때였나 하여간 사춘기가 찾아올 때쯤이었는데. 학교에서? 맞지? 친구가 소개해준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내 친한 친구들 뒤엔 네가 늘 서 있었잖아 재수 없게. 와서 인사라도 하지 뭘 그렇게 멀뚱거렸어. 괜히 너를 못 본 체하고 지나갈 때도 많았잖아. 그 시간들이 아깝긴 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좀 미리 알고, 가까이 지낼 걸 요즘도 생각해. 근데 뭐 어쩌겠어. 우리 팔자에. 사실 너 나랑 아주 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 거. 너도 알고 있었어? 그땐 너무 어려서 널 부르는 법도 말도 몰랐는데 어릴 때부터 있던 내 습관에도 사진에도 일기장에도 네가 담겨 있더라. 지독하지. 내 인생 어디부터 네가 묻어있고 어디까지 네가 끼어들까.
 
그래서 그러는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너 모른다고 하면 안 돼. 아직 대답은 하지 말고. 너 때문에 짝사랑을 망친 일이 많았어. 왜 그랬어? 네가 자꾸 옆에서 괜히 부추겼잖아. 이게 사랑인지 아닌지도 몰랐는데 괜히 네 얘기만 듣다가 서툴게 걸음이 꼬일 때가 많았어. 짜증 나. 2월 14일에 초콜릿을 주지 못하고 말 붙일 기회를 11월 11일까지 기다렸다고. 아니면 자연스럽게 말을 할 수 있게 내가 다치거나 홍수라도 나길 바랐다고. 결국 그때도 나는 너 때문에 다른 애한테 전달해 달라고 했어 너 때문에. 알아?
 
...
 
너무 쏘아대기만 해서 미안해. 나 기회만 있으면 남 탓하는 거 너도 알지? 그런데 나한테는 진짜 많은 부분이 너 때문이야. 나는 내 나쁜 모습들이 너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좋은 모습도 너 덕분이었어. 내가 아무리 너를 미워해봤자 밀어낼 수 없는 작은 방에 같이 지내는 기분이야. 그래서 이제 받아들여 보려고. 이제는 안 미워하겠다고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해 볼게. 적어도 너를 인정할게. 이 말을 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편지1 중에서

 
 
 
이 말을 하기까지 참 오래 걸렸어. 너를 나의 일부로 인정하겠다는 말. 너를 받아들이기로 노력하겠다는 말.. 나의 모든 결핍들에게 이제 와 말하지만 미안하다. 너무 미워하기만 해서.. 특히 중고등학생 때 그랬지. 그건 나 자신을 미워한 것과 다름없었어. 하지만 이제는 안 그래. 내 인생을 긍정하고 나 자신을 존중해. 결핍으로 가득했던 지난날들도 나의 인생이었으니 무시하지 않을 거야. 나의 모든 결핍들이여, 내게서 아름답게 승화되어라. 
 
 
 
 
 
 
 
 
 

-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