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미움받을 용기> #40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기시미 이치로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
자신을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먼저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라.
타인을 ‘행위’의 차원에서 즉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하는 차원에서만 생각하면 자리에 누워만 있는 노인은 주변 사람에게 폐만 끼치고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타인을 ‘존재’의 차원에서 살피고 거기에 존재하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한다. 우리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타인에게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다. 그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가정하자. 의식불명의 중태라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이때 당신은 어머니가 ‘무엇을 했는가’는 조금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오늘도 생명을 연장한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느낄 것이다. 존재의 차원에서 감사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위독한 상태의 어머니는, 설령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 있다는 자체만으로 당신이나 가족에게 큰 위안이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생명이 위태로워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다고 할 때, 주변 사람들은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기쁨을 느낄 것이다. 직접적인 행위가 없어도, 그저 무사히, 지금 이곳에 존재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할 것이다. 자신을 ‘행위’의 차원이 아니라 먼저 ‘존재’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볼 때 ‘자기만의 이상적인 모습’을 멋대로 지어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내린다. 예를 들면 부모의 말에 일절 말대꾸를 하지 않고,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좋은 대학에 가서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자녀. 그런 있을 수도 없는 이상적인 아이를 만들어놓고 자기 자식과 비교하며 불평을 하고 불만을 갖는다. 이는 이상적인 모습을 백점으로 놓고 천천히 점수를 깎는 격이다. 이것이야말로 ‘평가’라는 발상이다.
아이를 누구와 비교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그저 거기에 있어주는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면 된다. 이상적인 백점에서 감점하지 말고, 0점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존재’자체로 기뻐할 수 있을 것이다.
집 안에 틀어박혀 있던 아이가 밥을 먹은 후에 설거지를 도와줬다고 하자. 이때 ‘그런 건 안 해도 되니까 학교에나 가’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정해놓고 점수를 깎는 부모의 행동이다. 그런 말은 아이의 용기를 꺾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하지만 순수하게 ‘고맙다’라고 표현하고 기뻐할 수 있다면, 아이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고 새로운 한 발을 내딛을지도 모른다.
공동체 감각에 대해 아들러에게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그때 아들러의 대답은 이러했다.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 관계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나의 조언도 전적으로 그러하다.
「미움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생명이 위태로워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크나큰 기쁨이었으면 좋겠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워졌을 때를 상상해보면,
그가 그동안 서운하게 하고 속상하게 했던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로 계속 나를 괴롭게해도 좋으니
그저 무사히, 지금 이곳에 존재해주기만 한다면 그 어떤 대가도 지불하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확인할 것이다.
본래부터 있었던 건지, 지금 생겨난 건지 모를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사람을 존재 자체로 기뻐하는 것
그것은 얼마나 인간다운 삶인지.
누군가 나에게 유익을 주지 않는다해도,
행위가 아닌 존재로써 기쁘게 맞아들이겠다.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기쁨이기를 바라듯이..
아들러의 조언을 따라 나부터 시작한다.
다른 사람이 협력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나는, 이 길을 가겠다.
Alfred Adler (1870 ~ 1937)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