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설상소요 雪上逍遙> 변영로
설상소요 雪上逍遙
곱게 비인 마음으로
눈 위를 걸으면 눈 위를 걸으면
하얀 눈 눈으로 들어오고
머리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와서
붉던 사랑도 하얘지게 하고
누르던 걱정도 하얘지게 하고
푸르던 희망도 하얘지게 하며
검던 미움도 하얘지게 한다.
어느 덧 나도 눈이 돼 하얀 눈이 되어
환괴幻怪한 곡선曲線을 대공大空에 그리우며 내리는
동무축에 휩싸이어 내려간다 -
곱고 아름다움으로 근심과
죽음이 생기는
색채와 형태의 세계를 덮으러.
아름다웁던 <폼페이>를 내려 덮은
뻬쓰 쀼쓰 화산의 재같이!
변영로 1923. 1
열두 개의 달 시화집 一 月 「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중에서
눈 위를 거닐다.
어제에 이어 읽어 보는 변영로 시인의 작품.
그의 시에는 가난, 외로움, 그리움을 동반한 애틋한 정서가 잘 표현되어 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해서 번역작업을 곧잘 하였으며 교사와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런 그답게 이 시에 낯선 단어가 꽤 멋스럽게 등장한다.
강렬한 미움을 노래하던 시인은 이제 곱게 비인 마음으로 눈위를 걷는다. 눈 위를 걷고 있으면 검던 미움도 하얘지고, 누르던 걱정도 하얘진댄다.
그는 하얀 눈이 되어, 곱고 아름다움으로, 근심과 죽음이 생기는 색채와 형태의 세계를 덮고 싶다 말한다.
나 역시 그러하고 싶다.
미움과 증오로 가득한 이 세상을 곱고 아름다움으로 덮고 싶다.
그 곱고 아름다움이란, 사랑..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당신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어떠해도 사랑하는 사랑.
그 사랑으로 덮고 싶다.
- J -
변영로 (1898~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