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日記_1
완전히 하루를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를 계획했다. 중요한 계획은 역시 작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도무지 써지지가 않는다. 영감이 내리질 않는다. 캐서린 맨스필드Katherine Mansfield의 일기를 읽었다. 무언지 몰라 압박을 느낀다. 죽음의 위협을 받는 좋지 못한 건강 상태에서도 그의 쉴 새 없이 쓰려는 그 의욕이 내게 많은 훈계를 준다. 10시에 이층 자기 방엘 올라서 각혈이 심해가지고 10시 반에 숨을 거뒀다 한다. 사람이 죽기 전 30분까지도 이층 같은데를 올라갈 수 있다는 데 나는 놀랐다.
남을 만한 작품을 써보겠다는 야심과 함께 나는 요즘 돈에 대해서도 또 여기 못지않게 생각하고 있다. 돈 때문에 귀찮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돈만 있다면 직장엘 나가서 그 마땅치 않은 인간들과 마주앉아 내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 일을 당장에 집어치울 수 있지 않은가? 필요한 책이나 좀 맘대로 사다 쌓아놓고, 혼자 들어앉아 마음 놓고 내 구상을 뻗쳐 나가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는데, 다달이 최소한도로 먹을 것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이제 정말 짜증이 나고 싫어졌다. 돈은 가끔 내 긍지까지를 잔인하게 꺾어주었다.
이즈음에 와서 나는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 드는 것을 느낀다. 혼자 살아나가는 것을 뭘 그처럼 걱정하느냐는 것은 전혀 모르는 섭섭한 소리들이다. 나는 걱정이 많다. 나는 흉한 꼴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 한데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만 같다.
맑은 날씨하며 따스한 봄 햇살에 밖엘 나오니 당장에 살 것 같다. 나는 확실히 신경쇠약이었다. 나오니 이처럼 바깥세상은 좋은 것을, 집구석에는 그 늙은 할머니를 바라보며 속을 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에는 이 필운대弼雲臺가 행화촌杏花村이었다는데, 살구나무는 내 눈에 한 그루도 안 보인다.
토박이 서울 사람들이 많이 사는 이 우대 풍경이 그다지 맘에 안 들어 다른 데로 이사를 좀 했으면 하나, 모든 절차와 잡무들이 무서워 내버려 둔다. 이런 일에 내가 늙기 싫다.
요즘 세상이 귀찮아 죽었음 좋겠다고 했더니 밥 짓는 할머니는 또 냉큼 “선상님은 세상이 구찮으시니, 나는 내 일신이 구찮아 하루가 급한데...”하고 받는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했다. 양심으로 돌아가 저 불쌍한 노인을 이젠 좀 덜 시켜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뉘 집을 찾느라고 00동을 헤매면서 예쁜 양관洋館들을 수없이 지나쳤다. 풀빛으로 파랗게 단장을 한 울타리며 현관에 수박등이 달려 있는 살기 좋은 집들, 또 벽돌 담장 밖으로 넝쿨 장미가 휘늘어진 문화주택들을 지나친다. (중략)
1956년 3월 27일
노천명 수필 전집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먹고살기 위해'라는 전제로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해야 한다면 매사 짜증 나고 싫을 것 같다. 그 전제 앞에 굴복하는 것은 스스로를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가. 전제를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혼자 살면 걱정이 적은 것은 분명하지만 각자의 분량이 있는 것 같다.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의 생활을 책임지려는 사람에게는 헤아려야 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람은 관심을 한 군데에 두는 것보다 여러 방면으로 두고, 내면의 창을 바깥으로 어느 정도 열어 두어야 한다. 첫째는 자신을 위하여, 둘째는 나도 모를 그 누군가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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