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日記_3
X에게 내 시집을 괜히 주었다고 후회한다. 내 시집이 그 집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바늘방석에 올라앉은 것처럼 송구해 할 것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다. 시집은 얼마나 나를 원망할까? 그런 곳으로 보내준 것을....
봉건시대에 시집을 잘못 보내준 부모를 원망하는 딸의 얼굴을 나는 상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증정할 데를 정말 엄선한다. 이 경우 결코 친•불친(親不親)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내 책을 성의 있게 읽어 줄 사람이라야 되는 것이다.
책꽂이에 꽂아놓거나 할 사람은 안 된다. 꽂아놓을 책꽂이도 없고 식구들이나 혹은 그 집에 드나드는 객들 손에만 지워진다는 경우도 불쾌하다. 적어도 내 책을 소중히 여겨주고 거기서 좋은 구절을 하나라도 골라낼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몇 푼 되잖는 책 하나를 주면서 끔찍이도 까다롭다고 할 것이지만, 여기 내 얘기는 돈과는 다른 얘기다. 적어도 내 손으로 이 책이 나누어지는 경우 이러한 의도에서 행해지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이 약한 나는 가다가 당치 않은 대로 내 책을 보내는 실수를 하는 때가 있다.
이런 실수를 한 뒤의 내가 받는 마음의 괴로움이란 작은 것이 아니다. 책이 그 집에 가서 하찮은 존재가 된다는 것은 마치 나 자신이 그 집엘 가서 신통치 않은 대접을 받는 거와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롭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그러고 보면 작품이란 작가 자신의 육체의 일부분이 되어 피가 통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956년 4월 2일
노천명 수필 전집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시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나에게는 어릴 때부터 써 온 수십 권의 일기장이 있는데 내가 세상을 떠나면 이건 어디로 갈까, 혹여나 누군가에게 소장할 가치가 있어 줄까, 나에게는 거액을 준다 해도 바꾸지 않을 귀중한 기록인데..라는 생각을 할 때면 쓸쓸한 마음이 든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람과 같이 홀연히 사라지더라도 글만은 남아서 누군가에게 작은 위안과 재미가 되어준다면 더없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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