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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설야 산책> 노천명 본문

위로가 되어 줄 시

시 <설야 산책> 노천명

His 제이 2023. 12. 30. 20:45

 

설야雪夜 산책

 
저녁을 먹고 나니 퍼뜩퍼뜩 눈발이 날린다. 나는 갑자기 나가고 싶은 유혹에 끌린다. 목도리를 머리까지 푹 눌러쓰고 기어이 나서고야 만다.
나는 이 밤에 뉘 집을 찾고 싶지는 않다. 어느 친구를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이 눈을 맞으며 한없이 걷는 것이 오직 내게 필요한 휴식일 것 같다. 끝없이 이렇게 눈을 맞으며 걸어가고 싶다.눈이 내리는 밤은 내가 성찬을 받는 밤이다. 눈은 이제 대지를 희게 덮었고, 내 신바닥이 땅 위에 잠깐 미끄럽다. 숱한 사람들이 나를 지나치고 내가 또한 그들을 지나치건만, 내 어인 일로 저 시베리아의 눈 오는 벌판을 혼자 걸어가고 있는 것만 같으냐?가로등이 휘날리는 눈을 찬란하게 반사시킬 때마다 나는 목도리를 더욱 눌러 쓴다.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느끼면서도 발길은 좀체 집을 향하지 않는다.기차 바퀴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지금쯤 어디로 향하는 차일까. 우울한 찻간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 속에 앉았을 형형색색의 인생들,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를 한자리에 태워 가지고 이 밤을 뚫고 달리는 열차, 바로 지난해 정월 어떤 날 저녁의 의외의 전보를 받고 떠났던 일이, 기어이 슬픈 일을 내 가슴에 새기게 한 일이 생각나며, 밤 차 소리가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워진다.이따금 눈송이가 뺨을 때린다. 이렇게 조용히 걸어가고 있는 내 마음속에 사라지지 못할 슬픔과 무서운 고독이 몸부림쳐 견디어 내지 못할 지경인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다.이리하여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뉘집인가 불이 환히 켜진 창 안에서 다듬이 소리가 새어 나온다.어떤 여인의 아름다운 정이 여기도 흐르고 있음을 본다. 고운 정을 베풀려고 옷을 다듬는 여인이 있고, 이 밤에 딱다기를  치며 순경巡警을 돌아 주는 이가 있는 한 나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머리에 눈을 허옇게 쓴 채 고단한 나그네처럼 나는 조용히 집문을 두드린다.눈이 내리는 성스러운 밤을 위해 모든 것은 깨끗하고 조용하다.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내가 그림자같이 들어옴이 상장喪章처럼 슬프구나.창 밖에선 여전히 눈이 싸르르싸르르 내리고 있다. 저 적만한 거리 거리에 내가 버리고 온 발자국들이 흰 눈으로 덮여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나는 가만히 눕는다. 회색과 분홍빛으로 된 천장을 격해 놓고 이 밤에 쥐는 나무를 깎고 나는 가슴을 깎는다.
 
노천명

열두 개의 달 시화집 十二月 「편편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중에서

 

《Tain in the Snow, 1875》 Claude Monet


 
 
시인에게 눈 내리는 밤은 성찬을 받는 밤. 성스러운 밤.

 
눈이 오는 이 밤, 성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쳐 가는 거리에서 나에게는 그들이 조연, 그들에게는 내가 조연.
 
이 많은 사람들 속에 있어도 홀로 있는 듯한 기분은 무얼까. 나는 고독이라 부른다.
 
시인은 이 고독함을 원하면서도 슬퍼했던가.
 
형형색색의 인생들, 기쁨을 안고 가는 자와 슬픔을 받고 가는 자. 시인은 분명 후자였지. 사라지지 못할 슬픔을 간직한.
 
사람은 영원히 외로운 존재일지도 모른다고 해.
 
그래, 우리는 모두 신 앞에서 단독자니까.
그러나 외로움이 처량하고 슬프기만한 것은 아니야.
 
나에게 고독은 단독자로서 삶을 마주할 용기를 주고, 인생을 담담히 헤쳐나갈 힘을 공급해주던 걸.
 
시인은 꽃 한 송이 없는 방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죽음처럼 슬프다고 했지.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의 슬픔에만 골몰하지 않고, 나와 같이 살아있는 누군가를 위하여 기꺼이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한다면 우리는 우리다운 삶을 살게 될거라고 생각해.
 
어떤 이의 아름다운 정이 지금 여기에 흐르고, 우리도 아름다운 마음으로 돌아가도록.
 
혹여나 내가 왜 사는지, 그 뜻없는 질문의 소용돌이 속에 헤메고 있다면, 삶을 시작한 주체가 나 스스로가 아님을 알고, 그러하기에 잘 살아가라고 말해주고 싶어.
 
나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려주는 존재가 늘 우리와 함께 있음을 기억하면서.
 

- J -

 
 
 
 
 

노천명(盧天命1912~1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