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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봄, 봄날은 아침🌿
수필 <겨울밤의 이야기> 노천명 본문
겨울밤의 이야기
“좋아하는 눈 왔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멈이 내 창 앞에 와서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에 얼른 덧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고 있어 내가 또 싱겁게 좋아했더니 저녁부터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지고 말았다.방이 외풍이 세서 어제 오늘로 부쩍 병풍이 생각나고 방장 만들 궁리를 한다. 시골집의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을 가져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 병풍을 치고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박 새시며 얼굴에 손이 못 올라가게 지키셨다고 들었다. 지금 그것을 내 방에다 가져다 치고 보면 내 생각은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타산 뾰죽한 멧부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라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떠나셨다. 그래가지고는 그제나 시방이나 몸이 약한 내게 노루피를 먹이려고 하시는 통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랑에 나가 돈을 달라던 내가 온종일 아버지한텔 나가지 못하고 숨어서 상노애더러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래오라고 울고 매달린 적도 있었고 어려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따랐다. 술을 못 하시는 아버지가 늘 사랑에 가 조용히 앉아서 골패를 떼시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골패를 섞는 소리는 왜 그렇게 듣기 좋았는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고 나이를 차츰 먹고 보니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늦도록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복된 일이다. 헌데 세상 사람이 흔히 부모를 여의고 나서야 어버이가 귀한 줄을 통절히 느낀다는 것은 이 무슨 안타까운 일이랴.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동화 같은 옛일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겨울밤은 길고 내 마음은 구성진데, 비를 머금은 날이 밤새도록 기차 바퀴 소리를 들려 주면 실로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츠아라리엔더가 “남녘의 유혹”에서 느낀 것 같은 향수에 내가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이런 시간이란 어찌 보면 청승스럽게도 보이나, 실은 그 위에 가는 사치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진실로 잔인하게 나는 이것을 즐긴다. 어떠한 다른 환경을 가져 본다 치더라도, 내 가슴에 지니는 향낭은 없이도 견딜 수 있으나, 일종의 이 ‘페이소스’가 없이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실상 인생 생활에 이 비애가 없다면 도대체 심심해서 어떻게 배겨 내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다 고독을 지니고 다니는 하이칼라는 없는가?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내가 아끼는 신비로운 이 긴 밤들을 그 친구와 함께 화롯가에서 얘기를 뿌리며 밝혀도 좋겠다. 늙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밤이 한없이 아깝다.
노천명
다행이다. 눈보라를 보면 어머니가 생각나 늘 우울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태생이 눈을 좋아하도록 태어난듯 싱겁게 좋아하고 있으니.
객지생활. 결혼도 하지 않고,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스스로 벌어 살아가는 삶. 그녀는 치열하게 글을 써가며 생계를 꾸려나간 듯하다. 그녀의 일기를 보면 더욱 맞다는 확신이 든다.
1956년 3월 27일
... 남을 만한 작품을 써보겠다는 야심과 함께 나는 요즘 돈에 대해서도 또 여기 못지않게 생각하고 있다. 돈 때문에 귀찮은 일이 많기 때문이다. 돈만 있다면 직장엘 나가서 그 마땅치 않은 인간들과 마주앉아 내겐 맞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그 일을 당장에 집어치울 수 있지 않은가? 필요한 책이나 좀 맘대로 사다 쌓아놓고, 혼자 들어앉아 마음 놓고 내 구상을 뻗쳐 나가며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겠는데, 다달이 최소한도로 먹을 것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이제 정말 짜증이 나고 싫어졌다. 돈은 가끔 내 긍지까지 잔인하게 꺾어주었다.
이즈음에 와서 나는 여러 가지 걱정이 머리 드는 것을 느낀다. 혼자 살아나가는 것을 뭘 그처럼 걱정하느냐는 것은 전혀 모르는 섭섭한 소리들이다. 나는 걱정이 많다.
나는 흉한 꼴을 남에게 보이기 싫다. 한데 그것은 아무래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것만 같다.
노천명 수필전집<이기는 사람들의 얼굴> 중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생계에 대한 문제의식과 추구하는 삶의 양식 간에 괴리감이 존재하는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는 그녀의 삶에서 동질감을 느낀다.
눈보라가 치는 것은 좋은데 외풍이 심하니 시골집에 두고 온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이 떠오르고, 그 병풍에 깃든 이야기가 떠오르니 그것은 시인이 어릴 적 홍역에 걸려 앓던 밤, 그녀의 곁에서 밤을 꼬박 새시던 어머니.
그리고 이어서 생각나는 사람, 몸이 약한 딸을 위해 눈이 오는 날 사냥을 나가 노루피를 구해오시던 아버지. 다정하고 인자하신 아버지.
그녀가 객지 생활을 하고 나이를 차츰 먹으며 깨닫게 된 것, 부모를 오래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라는 것.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생각지도 깨닫지도 못하니 슬픈 현실.
잠이 오지 않는 겨울 밤, 비를 머금은 이 밤. 한없이 향수에 빠져 들어간다. 이 순간은 청승맞다기보다 오히려 사치스러울 만큼 행복한 것이니 견딜 수 없이 좋은 것.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다 고독을 지니고, 인생에서 오는 비애를 간직한 사람 어디 없는가. 내가 아끼는 신비로운 이 긴 밤을 그런 친구와 함께 지새우며 끝없이 이야기 나누고 싶어라.
- J -
노천명盧天命 ( 1912~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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