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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겨울밤> 노천명 본문

위로가 되어 줄 시

수필 <겨울밤> 노천명

His 제이 2024. 1. 23. 22:04

 

겨울밤

 
겨울 날씨란 눈이 좀 내려야 포근한 맛도 있고 한 법인데 이렇게 강추위를 하고 보면 견디어 내기가 미상불 어려운 것이다. 방장은 쳤는데도 워낙 외풍이 세고 보니 방 안에 앉아서도 이마가 곧 시려 들어온다.
 
하긴 전의 추위에 비긴다면 아무것도 아닌 셈이다. 밤중에 어디서 쨍하는 소리가 나서 무슨 소린가 했다가 아침에 보면 웃묵에 놓은 자리끼의 물이 땡땡 언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나 그뿐인가! 학교엘 가 보면 정말 발가락이 빠지는 것 같은 추위였다. 길을 가면서 얘기를 하면 입김이 나와서 굉장하고 그것이 목에 칭칭 감은 목도리에 고드름이 되어 매달리고 길가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촌에서 장작바리를 싣고 들어온 소의 입에서는 여물을 끊이는 가마에서 처럼 무럭무럭 김이 나고 소 턱주가리에는 으레 얼음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다.
 
그때에는 눈도 많이 와서 눈이 묻어 굵다래진 전깃줄을 보면 어린 마음에 그것이 무서운 아침도 있었다.
춥다춥다 해도 근래에 와서는 한결 덜 추워진 감이 있다. 그것은 인종이 많아진 탓인지, 또는 난방 장치들이 전에 비해 잘 되어 있는 까닭인지, 그 이유야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데도 덜 추워진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마다 빠짐없이 거리의 강시殭屍를 내는 아직도 무서운 추위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겨울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는 것도 잠깐 쓸쓸한 노릇이다.
 
나는 겨울철을 5월 첫여름 지지 않게 좋아하는데, 그 이유는 눈이 내리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눈은 이 땅 위에 흩어진 모든 보기 싫은 것들, 추한 물건들을 희게 덮어서 우리의 시야를 아름답게 해줄 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어지럽고 미운 것들까지도 곱게 덮어 주는 것이니 실로 나는 눈이 오는 날엔 누구에게나 천사가 되어 주고 싶다.
사냥꾼들은 사냥을 갈 수 있어 눈 오는 것을 좋아한다고 치고, 농사꾼들은 보리를 위해 좋아한다는 명백한 이유가 있지만, 내가 눈 오는 것을 좋아한다는 데에는 댈 만한 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저 눈이 펑펑 내리면 괜히 좋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도 창 밖에 흰나비들처럼 눈이 날리는 걸 보면 그냥 마음이 흐뭇해지고 한밤중 방안에서도 창 밖에 싸르륵싸르륵 눈이 조용히 내려 쌓이는 소리를 들으면 그냥 잘 수가 없어 불을 켜고 일어나 앉는다. 내 마음을 이토록 기쁘게 해주는 것이니 이는 내 좋은 친구가 아닐 수 없다.
친구도 오다가다 마음을 상하게 마련이지만 이 자연에서 오는 친구만은 그런 폐단이 없어 더욱 좋다. 좋은 친구를 만났을 때 어째서 바보처럼 좋아지는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나도 눈이 오면 어째서 마음이 즐거워지고 훈훈해지는 것인지 설명해 낼 수가 없다.
 
그러기에 나는 여름철 바닷가에 별장을 가지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지만, 겨울이면 가끔 초가지붕을 올린 산장을 서울 주변 어디다 하나 가졌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여기 대해서 호화로운 생각은 애당초 달릴 필요조차 없다.
이 산장이란 실로 초가삼간으로 족한 것이다. 하나는 내가 나가 집필을 할 방이요, 또 하나는 이 산장을 지키고 있다가 내가 나가는 날이면 차를 끓여 낼 수 있는 늙은이가 거처할 방과 그리고 부엌이 있으면 그만이다. 이 정도를 가지고 무슨 큰 욕망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몇 시쯤이나 되었는가 늘 지나가는 찹쌀떡 장수 아이가 지나간다.
“찹쌀떠억-”
하고 빼는 소리는 곧 골목 어디가 얼어붙게 생겼고, 그 빼는 소리는 오늘따라 찹쌀떡을 사라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골목을 사라지려는 그 울림이 무언가 호소하는 듯한 애절함이 있다.
 
섣달그믐도 가까운 겨울밤이 깊어 가고 있다. 지금쯤 어느 단칸방에서는 어떤 아내가 불이 꺼지려는 질화로에다 연방 삼발이를 다시 놓아 가면서 오지 뚝배기에 된장찌개를 보글보글 끓여 놓고, 지나가는 발소리마다 귀를 나발통처럼 열어놓고 남편을 기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따뜻한 정이 있어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히 녹여 주는 한 겨울은 춥지 않다.
 
노천명 
 

by 브라운파크


 
 
지금 내가 숨 쉬고 있는 여기는,

강추위가 이어지고 있는 겨울의 어디쯤.
추워도 너무 춥다.
현재 기온 영하 9.4도
 
이런 날 겨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읽는 건 최고의 만찬.
시인의 수필 <겨울밤>은 그녀의 겨울시와 수필의 압축판이나 다름없다.
그녀가 겨울을 좋아한다는 것, 그 이유는 눈이 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눈이 오는 것이 친구 같다 한다. 전혀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자연에서 온 친구.
 
그녀는 겨울산장 하나 가졌으면 하는 소박한 꿈 하나를 가지고 있었고, 그 꿈은 꽤 명료하다.
위치는 서울 주변. 방 두 개, 부엌 하나. 방 하나는 집필실.
(나의 꿈 하나와도 비슷하네.)
 
그녀는 상상한다. 어느 단칸방에서 한 아내가 된장찌개를 끓여 놓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을. 지나가는 발자국소리마다 귀 기울이고 기다리는 모습을.
 
그 아내의 남편도 상상해 보자. 집에 도착하기도 전, 시장기를 일으키는 구수한 냄새를 맡는다. 곧 아내의 기쁨이 될 그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울 것인가. 그는 천국을 가진 것이다.
 
이렇게 따뜻한 정이 흐르는 곳에 당신이 있기를,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는 훈훈함 속에 당신이 있기를 바란다.

 

- J -

 
 

 
 
 
노천명盧天命 ( 1912~19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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