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봄, 봄날은 아침🌿

산문 <별똥 떨어진 데> 윤동주 본문

위로가 되어 줄 시

산문 <별똥 떨어진 데> 윤동주

His 제이 2023. 12. 9. 20:12

 

별똥 떨어진 데

 

밤이다.

 

하늘은 푸르다 못해 농회색으로 캄캄하나 별들만은 또렷또렷 빛난다. 침침한 어둠뿐만 아니라 오삭오삭 춥다. 이 육중한 기류 가운데 자조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그를 나라고 불러두자.

 

나는 이 어둠에서 배태되고 이 어둠에서 생장하여서 아직도 이 어둠 속에 그대로 생존하나보다. 이제 내가 갈 곳이 어딘지 몰라 허위적거리는 것이다. 하기는 나는 세기의 초점인 듯 초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내 바닥을 반듯이 받들어 주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내 머리를 갑자기 내려 누르는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마는 내막은 그렇지도 않다. 나는 도무지 자유스럽지 못하다. 다만 나는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마침 다행할 것인데 그렇지를 못하구나! 이 점의 대칭 위치에 또 하나의 다른 밝음의 초점이 도사리고 있는 듯 생각킨다. 덥석 움키었으면 잡힐 듯도 하다.

 

마는 그것을 휘잡기에는 나 자신이 순질純質이라는 것보다 오히려 내 마음에 아무런 준비도 배포치 못한 것이 아니냐. 그리고 보니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을 불러들이기에도 또다른 한 가닥 구실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될까보다.

 

이 밤이 나에게 있어 어릴 적처럼 공포의 장막인 것은 벌써 흘러 간 전설이오, 따라서 이 밤이 향락의 도가니라는 이야기도 나의 염원에선 아직 서화시키지 못할 돌덩이다. 오로지 밤은 나의 도전의 호적好敵이면 그만이다.

 

이것이 생생한  관념세계에만 머무른다면 애석한 일이다. 어둠 속에 깜박깜박 조을며 다닥다닥 나란히한 초가들이 아름다운 시의 화사華詞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제너레이션의 이야기요, 오늘에 있어서는 다만 말 못하는 비극의 배경이다.

 

이제 닭이 훼를 치면서 맵짠 울음을 뽑아 밤을 쫓고 어둠을 짓내몰아 동켠으로 휘ㄴ히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을 불러온다 하자. 하나 경망스럽게 그리 반가워할 것은 없다. 보아라, 가령 새벽이 왔다하더라도 이 마을은 그대로 암담하고 나도 그대로 암담하고 하여 서 너나 나나 이 가랑지길에서 주저 주저 아니치 못할 존재들이 아니냐.

 

나무가 있다.

 

그는 나의 오랜 이웃이요 벗이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성격이나 환경이나  생활이 공통한 데 있어서가 아니다. 말하자면 극단과 극단 사이에도 애정이 관통할 수 있다는 기적적인 교분의 표본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처음 그를 퍽 불행한 존재로 가소롭게 여겼다. 그의 앞에 설 때 슬퍼지고 측은한 마음이 앞을 가리곤 하였다. 마는 돌이켜 생각컨대 나무처럼 행복한 생물은 다시 없을 듯하다. 굳음에는 이루 비길 데 없는 바위에도 그리 탐탁치는 못할망정 자양분이 있다하거늘 어디로 간들 생의 뿌리를 박지 못하며 어디로 간들 생활의 불평이 있을소냐.

 

칙칙하면 솔솔 솔바람이 불어오고, 심심하면 새가 와서 노래를 부르다 가고, 촐촐하면 한 줄기 비가 오고, 밤이면 수많은 별들과 오손도손 이야기할 수 있고 - 보다 나무는 행동의 방향이란 거추장스런 과제에 봉착하지 않고 인위적으로든 우연으로서든 탄생시켜 준 자리를 지켜 무진무궁한 영양소를 흡취하고 영롱한 햇빛을 받아들여 손쉽게 생활을 영위하고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질 수 있는 것이 무엇보다 행복스럽지 않으냐.

 

이 밤도 과제를 풀지 못하여 안타까운 나의 마음에 나무의 마음이 점점 옮아오는 듯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랑을 자랑치 못함에 뼈저리듯 하나 나의 젊은 선배의 웅면에 왈 선배도 믿지 못할 것이라니 그러면 영리한 나무에게 나의 방향을 물어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 동이 어디냐, 남이 어디냐, 아차! 저 별이 번쩍 흐른다. 별똥 떨어진 데가 내가 갈 곳인가 보다. 하면 별똥아! 꼭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야 한다.

 

윤동주 1941

열두 개의 달 시화집 十一月 「오래간만에 내 마음은」중에서

 

《 The Starry Night(De sterrennacht) 1889》 Vincent Van Gogh


 

 

또다시 밤.

 

없는 듯 있는 하루살이처럼 경쾌하다면 좋은련만

숨쉬는 것이 무겁고 버겁네.

 

나에게 행복이란 별스런 손님. 나와 무관한 것.

이 밤은 나에게 공포도, 향락도 아닌 비극일 뿐.

 

나에게 새벽이란 새로운 손님. 그러나 반갑지만은 않아.

새벽이 어둠을 몰아내주지 못하고 어둠은 계속 되는 것을.

 

 

나무.

나의 오랜 이웃이자 친구. 우리는 극과 극의 존재.

불행을 머금은, 가소롭고, 슬프고, 측은한 존재.

 

그러나 나무는 더없이 행복한 존재야.

솔바람과, 노래하는 새와

한 줄기 비와, 별들이 찾아와 함께 머무니.

탄생시켜준 자리를 지켜

그 자리에서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스러우니.

오로지 하늘만 바라고 뻗어갈 수 있으니.

 

나무에게는 없는 과제가 나에게는 있지.

오직 내가 풀어야 하는 과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할까, 알길 없고

암담하고 모호한 마음.

 

때마침 저기 번쩍 흐르는 별.

그래, 너에게 나의 운명을 지워 보낸다.

 

꼭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떨어져 달라고

부디 그렇게 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한다.

 

- J -

 

 

 

 

 

 

 

 

 

시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기가 행동해야 할 것을,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다만 결정하기 전 이렇게 저울 위에 올려 놓아 보는 것이다. 이성은 회피하라 말하지만 양심은 맞서라고 하는 내면의 갈등 속에서. 그리고 그는 결국 양심의 말에 따랐음을 안다.

 

 

 

윤동주 (尹東柱 1917 ~ 1945)

'위로가 되어 줄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 <비가 전하는 말> 이해인  (0) 2023.12.12
시 < 초겨울 > 교라이  (0) 2023.12.10
시 <생일 축시> 정연복  (1) 2023.12.07
시 <편지> 윤동주  (2) 2023.12.05
산문 <달을 쏘다> 윤동주  (4) 2023.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