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봄, 봄날은 아침🌿

이 평범한 95퍼센트의 것들이 언젠가 간절히 바라는 5퍼센트가 되기 이전에 본문

나에게 보내는 편지

이 평범한 95퍼센트의 것들이 언젠가 간절히 바라는 5퍼센트가 되기 이전에

His제이 2024. 9. 14. 16:26

 
토요일 오후. 내 손과 내 정신에 힘이 미약하다. 활기가 어느 정도 있고, 생기가 느껴지는 그런 컨디션에서 글을 쓰고 싶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시간이 멀찍이 흘러갈 것이며 현재 겪고 있는 상태에 대한 기록도 부재하거나 희미해질 것이기에 활기와 생기가 남아있는 한 모조리 그러모아 일단 써보려 한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마실 수 있는 것과 잠잘 수 있는 것, 읽을 수 있는 것과 생각할 수 있는 것과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꼽는 축복이다. (여기엔 상호작용이 필요한 '사랑하는 것' 등의 고차원적인 것은 예외로 둔다.) 사실 나는 지금 이 모든 것을 누리고 있다. 거기다 육체에 불편함이 없고, 통증도 없으며, 정신적으로도 이상 없이 기능한다. 나는 걸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그래서 손을 씻고 싶다 또는 손을 씻어야 한다(이 경우가 사실 훨씬 많다)는 생각이 들 때, 하던 일을 멈추고 욕실로 걸어 들어가 수도를 틀고 물을 축이고 비누를 문질러 거품을 내고 손을 비벼서 다시 물을 틀고 헹궈낸다. 그리곤 수건이 있는 곳으로 몸을 돌이켜 물기를 닦는다. 이제 '해야 한다'라고 리스트에 올랐던 일이 지워지고 다음 할 일을 한다.
 
출근을 할 때도 마찬가지. 출근준비를 마치고, 정해놓은 시간까지 휴식을 한다. 시간이 되면 자리를 정돈하고, 옷을 꺼내어 하나씩 차례대로 입는다. 가방을 꾸린다. 마스크를 챙긴다. 환기를 위해 열어 둔 작은방 창문을 닫는다. 신발을 신는다. 전신 거울을 보고 옷매무새를 살핀다. 현관을 나서기 전에 정돈된 집을 둘러보고 잊은 것은 없는지 점검한다. 이제 집을 나선다. 9층에서 1층으로.
 
걷는다. 주변의 풍경을 보고 (나무, 건물, 사람들, 자동차, 하늘...) 바람결을 느끼고, 날씨를 가늠하고, 오늘 할 일을 그려보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걷는다. 횡단보도 두 곳에 멈춰 서서 주변을 살핀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사람들의 표정은 어떤지 편안해 보이는지 등. 신호가 바뀌고 그때부턴 멈추지 않고 계속 걷는다. 그렇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어린이집 현관 앞에 와있고, 이 문을 열고 들어서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이 시간부터는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이 정해진 업무에 열중한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당연히,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것만 해도 어찌 보면 이것은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내가 손을 쓸 수 없는 장애를 입었다면, 쓸 힘조차 없이 아픈 상태였다면, 쓰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우울감과 정신적 무기력함에 빠져있다면, 생활고에 시달려 이렇게 쓸 수 있는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해야 한다면, 이보다 더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있어서 기록할 시간을 낼 수 없는 처지라면... 나는 글을 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근래 알게 된 어떤 이는, 기록하는 것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기록할 수 없다면 사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내 생각은 그와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은 내게도 상당한 의미가 있으니. 
 
아까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 보자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과 같이 세분화해 보면 하루에도 이루어지는 무수한 동작들,  그 세세하고 잦은 일들을 다 해내는 그 일상이 과연 당연한 일인가, 과연 평범한 일인가.
 
내가 슬픔에 빠져 있거나 괴로움을 겪고 있어도 내 본업에 그 감정을 숨기고 일을 한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나면 다시 내 감정과 내 일상으로 되돌아오더라도 나는 해야 할 일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 삶의 질서가 나도 모르게 유지되고, 누군가에게 공헌하며, 나는 노동의 대가를 받아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휴식하고, 보고, 듣고, 읽고, 쓴다. 선물을 하고, 나눔을 한다. 이게 정말 내게로 귀결되는 그 '무엇'일까? (적당한 말을 찾기 어렵다.) 
 
아니라고 본다. 이 중에서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건, 내 힘과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 5퍼센트는 될까.. 그마저도 후한 범위 아닐까. 그 나머지는 모두, 받은 것이다. 그러니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원하지만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 왜냐하면 나는 그보다 더 한 것들을 (내가 스스로 증명했듯이) 이렇게 누리고 있으니까. 대단해 보이는, 특별해 보이는 그 5퍼센트 남짓의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한탄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아야 한다고 스스로 되뇐다. 지금 누리는, 일상이라고 말하는 이 평범한 95퍼센트의 것들이 언젠가 간절히 바라는 5퍼센트가 되기 이전에. 즉 그것들을 잃어버리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