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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이웃나라 언어의 숲> 이바라기 노리코 본문

위로가 되어 줄 시

시詩 <이웃나라 언어의 숲> 이바라기 노리코

His 제이 2024. 3. 5. 08:05

 

이웃나라 언어의 숲

 
숲이 얼마나 깊은지
들어가면 갈수록
가지가 우거져 심오하니
외국어의 숲은 울창하기만 합니다
낮에도 어두운 오솔길   홀로 타박타박
밤은 栗쿠리
바람은 風카제
도깨비는          おばけ오바케
뱀                     蛇헤비
비밀                 秘密히미츠
버섯                  타케
こわい코와이   무서워
 
입구 언저리에서는
모든 게 다 신기해
종알종알 떠들었습니다
명석한 표음문자와   청량한 울림
햇빛                陽の光히노히카리
토끼                うさぎ우사기
엉터리            でたらめ데타라메
사랑                愛아이
싫어요            きらい키라이
나그네            旅人 타비비토
 
다쿠보쿠는 1910년 이런 시를 읊었지요
일본 지도에 조선국이란 글자 새카맣게 먹으로
박박 지워나가며 가을바람 듣는다*
일찍이 일본어가 밀어내려 했던 이웃나라 말
한글
어떤 억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던 한글
ゆるして下さい  유루시테구다사이  용서하십시오
땀 뻘뻘 흘리며 이번에는 제가 배울 차례입니다
어느 나라 언어에도 굴복하지 않았던
굳건한 알타이어족의 한 줄기 정수에 ㅡ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온갖 애를 써가며
그 아름다운 언어의 숲으로 들어갑니다
 
왜놈의 후예인 저는
행여 긴장을 늦췄다가는
한이 서린 말에
잡아먹힐 듯합니다
옛날 옛적 아주 먼 옛날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둘러말하는 것도 한글의 재미이지만
그런 호랑이가 진짜로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딘가 멀리서
웃고 떠드는 소리
노래
시치미 뚝 떼고
익살을 떠는
속담의 보고이자
해학의 숲
 
대사전을 베개 삼아 선잠을 자면
"너는 왜 이제야 왔니" 하고
윤동주가 부드럽게 나를 꾸짖습니다
정말로 늦었지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너무 늦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젊은 시인   윤동주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
그대들에게는 광복절
우리에게는 항복절인
8월 15일이 오기 겨우 반년 전 일이라니
아직 교복 차림으로
순결을 동결시킨 듯한 당신의 눈동자가 눈부십니다
 
ㅡ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그리 노래하며
당당히 한글로 시를 썼던
당신의 젊음이 눈부시게 밝고도 쓰라립니다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
달빛처럼 맑은 몇 편의 시를
서툰 발음으로 읽어보지만
당신은 조금도 웃지 않으시네요
어찌할 수 없는 일
이제 앞으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요
가고 또 가서 넘어진다 하여도 싸리꽃 들녘**
 
 

* 25세의 젊은 시인 이시카와 다코보쿠가 한일합방 직후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자국 정부에 분개하며 쓴 5·7 ·5 ·7 ·7의 단가
** 하이쿠 시인 마쓰오 바쇼가 기행문집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 남긴 구절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  「처음 가는 마을」에서

 

《Gilded Forest, 2010》 Michael Godfrey


 
 
이 시를 읽어 내려가면 한글의 위대함을 느낀다.

 
한글.. 신분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읽고 쓰기 쉬운 문자를 만들고자 했던 세종대왕의 정신.
 
수많은 반대와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완성된 글자는, 만든 이의 정신이 그대로 계승되어 뜻을 이루고 일제의 탄압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한글을 시인은 아름다운 언어의 숲이라 부르고 있다.
 
1945 8 15일, 우리에게는 광복절. 그들에게는 항복절.
 
ㅡ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일제의 감시 속에서도 당당히 한글로 시를 썼던 젊은 시인. 그의 정신을 잊지 않으리.
 
독립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독립된 문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문득 감사하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아침.
 

- J -

 
 

 
 
 
 
이바라기 노리코 (茨木のり子 1926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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